본문 바로가기

Atlas MagazineNo.01색

빨강의 세기, 형광 연두의 십 년

색상값이 기록된 아이덴티티 236건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았다. 20세기 작업 20건 가운데 15건에 빨강이 있었고 2020년 이후 작업에서는 형광 연두가 15번 나타났다.

브랜드 아틀라스 아카이브에는 아이덴티티 작업의 색상값이 헥스 코드로 기록된 항목이 236건 있다. 그중 작업 연도가 적힌 235건을 연대순으로 세우고 색을 하나씩 분류해 봤다. 기준은 단순하다. 팔레트 안에 선명한 빨강이 있는지, 채도가 아주 높은 연두가 있는지를 셌다. 형광 연두는 색상각 64~95도, 채도 85% 이상, 밝기 45~65% 사이의 색으로 정했다. 숫자는 이 아카이브에 한정된 것이고 세상 모든 브랜드의 통계는 아니다. 그래도 두 시대의 차이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20세기의 빨강

2000년 이전의 작업은 20건이다. 이 가운데 15건의 팔레트에 빨강이 들어 있다. 목록을 보면 이유가 짐작된다. 대부분 멀리서, 빠르게, 한눈에 보여야 하는 것들이다.

Plate 120세기 아이덴티티의 빨강. 셸과 AGIP는 1971년, NASA와 씨티뱅크는 1975년, 도요타와 런던 버스는 1989년 작업이다.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가 1971년에 다듬은 로열 더치 쉘의 팔레트는 빨강 #E32024와 노랑 #FEF02B 두 가지뿐이다. 셸이 캘리포니아에 첫 주유소를 세울 때 그 지역의 스페인 연고를 반영해 스페인 국기의 색을 골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같은 해 석유 회사 AGIP도 밥 노르다(Bob Noorda)와 유니마크 인터내셔널의 손을 거쳐 노랑·검정·빨강의 팔레트를 얻었다. 도로 위에서 운전자의 눈에 걸려야 하는 업종이다.

NASA의 1975년 아이덴티티, 흔히 '웜(worm)'이라 불리는 로고는 붉은 단색을 기본으로 삼았다. Danne & Blackburn은 이 빨강을 흰색이나 검정, 밝은 배경 위에서만 쓰도록 규정했다. 같은 해 Anspach Grossman Portugal이 작업한 씨티뱅크의 팔레트에도 빨강 #EF1B1A가 들어 있다. 1989년 Nippon Design Center가 만든 도요타의 기록은 아예 빨강 #D01422 한 가지다.

교통 분야는 빨강을 기능으로 쓴다. 런던 버스의 1989년 작업은 빨강 #F54029와 노랑 #FCC954로 이뤄졌다. 런던의 교통 당국은 수단마다 색을 달리한 표지 체계를 운용하는데 버스에 빨간색을 준다. 1979년 Jiří Rathouský가 그린 프라하 지하철의 팔레트에는 빨강·노랑·초록·파랑 네 가지가 들어 있다. 1989년 일본의 토마토 은행은 이름처럼 빨강 #E10004와 초록 #029F1C 두 가지를 골랐다.

빨강이 없던 다섯 곳

빨강을 쓰지 않은 20세기 작업은 다섯 건이다. 그중 셋이 항공사다. 1961년 FHK Henrion이 작업한 KLM은 밝은 파랑 #24A3E3과 짙은 파랑 #094684, 1970년 Chermayeff & Geismar가 다듬은 팬아메리칸 월드 항공은 파랑 #0090D0에 검정과 흰색이다. KLM의 파랑은 하늘과 비행, 신뢰의 인상을 담았고 핵심 구성은 60년이 넘도록 거의 그대로다. 하늘을 파는 회사는 하늘의 색을 골랐다.

#08A8CA#BDDD34#000000
Plate 21963년 이스라엘 항공(Israel Airlines)의 팔레트. 청록 #08A8CA 옆에 연두 #BDDD34가 있다. 형광 연두보다 채도가 한 단계 낮은 연두다.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 항공이다. 1963년 Otto Treumann 등이 정립한 정사각 구성의 팔레트에는 연두 #BDDD34가 들어 있다. 1972년 Lloyd L. Carson이 만든 엑스포 '74의 팔레트에도 연두 #C4D600이 있다. 연두는 20세기에도 있었다. 다만 한 단계 차분했다. 이스라엘 항공의 #BDDD34는 채도가, 엑스포 '74의 #C4D600은 밝기가 형광 연두의 기준에 조금 못 미친다.

2020년 이후, 형광 연두

2020년 이후 작업은 178건으로 아카이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빨강이 든 팔레트는 65건이다. 여전히 많은 편이지만 20세기처럼 압도적이지는 않다. 대신 새로 나타난 색이 있다. 채도를 끝까지 올린 형광 연두다. 헥스 코드로 쓰면 #D0FF00이나 #E1FF00처럼 초록 값이 FF에 닿고 파랑 값이 거의 0인 색이다. 20세기 작업 20건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이 색이 2020년 이후에만 15건의 팔레트에 들어 있다.

Plate 32020년 이후 형광 연두가 팔레트에 들어간 작업들. 몬조 2022년, Bolt와 레딧 2023년, 슬레진저 2024년, 나이키 런과 트립어드바이저 2025년.

쓰임새는 제각각이다. 온라인 결제 핀테크 Bolt는 2023년 런던의 Koto와 함께 '라이트닝 옐로' #E1FF00을 주색으로 삼아 강한 대비를 만들었다. 클릭 한 번으로 끝나는 결제의 속도감을 색으로 옮긴 것이다. 테니스 브랜드 슬레진저의 2024년 팔레트는 #EBFF00과 검정 두 가지뿐이다. 이 브랜드의 노란 테니스공은 1986년 윔블던에서 처음 쓰였다. 공의 색이 곧 브랜드의 색이 됐다. 2025년 Porto Rocha가 작업한 나이키 런은 #D0FF01에 주황 #FF4401과 검정을 붙였다.

다른 쪽에서는 형광 연두가 보조색으로 들어간다. Pentagram이 2023년 작업한 레딧의 팔레트는 오렌지레드가 중심이고 연두 #AEF00F는 곁에 선다. 몬조의 2022년 팔레트도 핫 코랄이 1순위이고 #C3FF34는 아홉 가지 색 가운데 하나다. 2025년 Koto가 다듬은 트립어드바이저의 열두 가지 색에도 #CFFE20이 끼어 있다.

#01EA5A#002B11#FFFFFF#000000#01C6E6#238AFF#CFFE20#A3CF01#FFED0D#FF9625#FF4D51#FF58E6
Plate 4트립어드바이저의 2025년 팔레트. 트레이드마크인 초록 계열을 중심으로 열두 가지 색을 두었고 그 가운데 형광 연두 #CFFE20이 있다.

화면이 바꾼 색

형광 연두가 2020년 이후에 몰린 이유를 아카이브의 기록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이 색을 쓴 작업의 상당수가 앱과 화면을 주 무대로 하는 회사다. 온라인 결제, 은행 앱, 커뮤니티, 여행 리뷰가 그렇다. 형광 연두는 인쇄로는 제대로 재현하기 어렵지만 화면에서는 그대로 빛난다. 검정 배경 위에서 특히 그렇다. 슬레진저와 나이키 런이 이 색을 검정과 짝지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0세기의 빨강이 도로와 간판, 버스 옆면에서 멀리 보이기 위한 색이었다면, 2020년대의 형광 연두는 작은 화면 안에서 손가락을 끌어당기기 위한 색이다. 두 색 모두 눈에 띄려고 고른 색이라는 점은 같다. 달라진 것은 브랜드를 만나는 장소다.

Plate 5형광 연두와 그 이웃 색은 스포츠 리그부터 음악 앙상블까지 퍼졌다. 핀란드 축구 리그 Veikkausliiga와 빅 카르텔은 2025년, 런던 신포니에타와 야후는 2026년 작업이다.

이 흐름은 2026년 작업까지 이어진다. 핀란드 축구 리그 Veikkausliiga는 오랫동안 핀란드 국기를 반영한 파랑·하양·빨강 삼색을 썼는데, 2025년 Bond와 함께 연두 계열을 포함한 열 가지 색의 팔레트를 얻었다. 런던 신포니에타는 2026년 NB Studio와 함께 #DFFF40을, 1995년부터 보라색 워드마크를 지켜 온 야후는 2026년 jkr과 함께 보라 옆에 노랑에 가까운 #F8FB4B를 두었다. 빅 카르텔의 열 가지 색에도 #DBFF00이 있다. 빨강이 한 세기 동안 그랬듯, 형광 연두도 이제 특정 업종의 색이 아니라 시대의 색이 되어 가고 있다.